brunch

매거진 SF 리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지극히 SF적인, 우리나라 최고 레벨 소설가의 세계

장강명의 『지극히 사적인 초능력』을 읽고

우선은, 나는 SF와 과학 분야의 독서만을 극편식하는 편식충임을 밝힌다. 한 10년 전쯤엔, 다양한 분야와 장르를 섭렵하는 '종합독서가'일 때도 있었지만 다 옛날이고, 지금 SF에 뜻을 둔 후로는 일부러 SF 분야만 골라서 읽는 슬픈 짐승이 된 지 일이 년 되었다. 그러나 SF만 편식한다 해서 소설과 문학에 대해 편협한 관점을 가질 위험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이제 동시대 SF엔 아이작 아시모프 느낌의 이공계 작가들만 있는 게 아니고, 한국에 SF 붐이 좀 인지 꽤 되었으므로 순수문학과의 이종교배로 (순수)문학 전문가들이 SF에 도전하는 경우도 많이 생겼다. 그 도전이 성공적인지 아니면 수박 겉핥기 식의 실패인지를 묻는다면, 스터전의 법칙을 언급하겠다. 한국 SF의 90%는 쓰레기다. 그런데, 당연하지만, '물리학이건, 화학이건, 사회학이건, 음악이건, 락음악이건, 컨트리 음악이건. 모든 것의 90%는 쓰레기다.'(대니얼 데닛) 한국SF뿐 아니라 한국 순수문학, 외국 SF, 소설이라는 장르 모든 것들이 모두, 90%는 쓰레기다.


장강명 작가는 2011년 『표백』이라는 장편소설로 등단해 소설가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그 전에는 동아일보 기자였으니, "아, 글 잘 쓰는 문과였겠거니"하는 생각이 들 만 하다. 그러나 그는 사실 도시공학과를 졸업한 공대생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문과/이과의 이분법적 구분에 잘 들어맞지 않는 독특한 내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가 학생일 때에 SF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SF소설을 쓰기까지 했다는 사실은 그가 애초에 날 때부터 '글쓰는 이공계'였다는 걸 드러낸다.


그러나 그의 작품 목록을 보면 딱히 SF에 몰두한 느낌은 아닌데, 그 중 몇 안되는 SF 작품집이 바로 이 책, 『지극히 사적인 초능력』이다. 내가 읽어본 장강명 작가의 책 가운데 단 두 권 중 하나인데 (다른 한 권은 『표백』) 그의 작품들을 별로 접해 보지 않은 이유는 내가 앞서 말했듯이 현재 SF만 극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SF도 아닌 『표백』은 왜 읽었냐고? 밀리의 서재에 있길래)

지극히 사적인 초능력 - 장강명

그렇다고 해서 그의 SF 작품들이 '무늬만 SF'니, 'SF 향만 첨가했다'느니 한 수준은 아니다. 어떤 평을 읽어 보니 이 작품을 '사랑을 얘기하기 위해 SF적 요소들을 넣은 작품'이라고까지 하는 사람이 있던데, 난 이런 평을 두 가지 이유에서 반대하고 싶다. 첫째로, 일반적으로 SF 요소만 첨가했다고 그게 SF가 아닌 이유는 되지 못한다. 둘째로, 이 책은 한국 문학 사상 최고로 잘 쓰여진 SF의 반열에 오를 만한 작품이다.


아무도 문학성을 논하는 나의 글 따위는 읽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므로, 장강명 작가의 문학성 같은 건 언급하지 않도록 하겠다. 이따 본격적으로 SF 특성에 대해 언급하겠지만 그전에 단 한 가지 내가 언급하고 싶은 건 책의 구성이다. 단편 작품들 하나하나의 작품성을 넘어서, 단편을 묶는 구성을 통해 책 한 권을 완성해 내야 할 때가 있다. 이 고민은 앨범을 제작할 때 곡들을 어떤 순서로 배치하느냐에 대한 고민하는 것과 비슷하다. 앨범을 디자인하는 프로듀서의 이 고민이 제대로 정답을 냈을 때, 앨범은 '컨셉트 앨범'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그 성과를 대중들은 인정한다. 그런데 소설집에도 그런 게 있을까? 대중에게까지 그 노력을 인정받은 책을 나는 본 적은 없고, 편집자들도 그 노력에 대해 인정받고 싶어 하는 분위기는 아닌 것 같다. 이 책은 독특하게도 길이가 긴 중단편과 길이가 매우 짧은 엽편을 교대로 배치했다. 그렇게 하자 책 전체적으로 어떤 리듬감이 생겨났다. 길이가 길고 버거운 중편을 읽은 후 독자는 매우 짧은 엽편 소설을 이어서 읽게 되는데, 그 엽편들의 작품성은 매우 뛰어날 뿐더러 중편으로 인해 피곤했던 정신을 말끔히 해소하는 역할도 해 준다. 작품들의 '작품성'을 넘어 고객 경험(User Experience)에 있어서 참신하고 좋은 경험을 느끼게 해 주었다.




「정시에 복용하십시오」 (엽편)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먹으면 그 사랑이 지속되는 약이 개발되었다. 주인공과 연인은 서로 연애를 시작한 후 약을 복용했지만, 나중엔 그들의 지속성에 대한 능력을 과신하고 약을 끊었다. 그러자 역시나, 사랑이 식게 되었다. 주인공은 실연의 고통을 끊는 약을 먹으려 한다. 하지만 그는 실연의 아픔이 의미로 남을 수 있게 되길 바라면서, 약을 먹기 전 망설인다.


SF적인 디테일이 보이는가? 90%의 SF작가들이 '사랑에 관한 약'을 디자인하면, 십중팔구 그냥 '먹을 때 누군가 앞에 있으면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약'을 떠올리게 마련일 것이다. 여기서부터 출발하면 그냥 흔한 큐피드 얘기만 양산된다.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다. 장강명 작가의 스마트한 디테일은 '사랑을 하고 있을 때 약을 먹으면, 그 사랑이 권태기 없이 식지 않게 된다'. 그로부터 출발한 이야기 구조는 결론적으로 사랑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을 떠올리게 하는 결말로 치닫는다. 만약 내가 이 사람과 헤어지게 되었을 때를 상상해 보았을 때, 고통이 느껴진다면 그것이 사랑이다. 즉, 고통이 사랑의 본질이다.


「알래스카의 아이히만」 (단편)

경험 기계가 개발된 시대, 유대인을 절멸한 수용소의 소장에게 그 고통을 경험시키기 위해 경험 기계를 사용하도록 한다. 기계를 통해 유대인 생존자의 경험을 받은 소장은 고통에 몸부림친다.


'경험 기계'라는 SF적 소재와 설정은 나치와 유대인 학살에 대한 르포르타주 적인 주제와 결합한다. 이로 인해 우리는 윤리학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에 마주하는데, 이 질문은 지극히 평험하지만 심도깊다. 즉, '악인에게 스스로 저지른 악행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처벌할 수 있을까?'


「당신은 뜨거운 별에」 (단편)

과거에 엄마와 절연을 하고 예술계로 뛰어든 딸, 그녀는 금성으로 간 엄마에게 구해달라고 하는 암호를 받는다. 엄마를 부려먹는 회사로의 탈출을 위해 엄마와 딸은 계획을 세운다. 딸은 로봇의 춤을 이용해 로봇 통신모듈을 떼고 엄마가 다른 회사의 로켓을 탈 수 있게 한다.


작품 내 등장인물들의 문제의 해결책이자 플롯으로서의 트릭은 바로 로봇의 소프트웨어적인 움직임 알고리즘과 하드웨어적인 관절의 매커니즘의 불일치를 이용하는 것이다. 역시 이런 디테일한 SF적 설정은 이 작품이 하드SF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아스타틴」 (중편)

아스타틴'이라는 초지능 지배자는 복제인간을 양성해 자신의 후계에 대비한다. 15명의 복제인간들이 서로를 죽이며 아스타틴을 이으려 한다. 그러던 중, 주인공은 아스타틴이 예전에 만들어 놓은, 자신의 이상형의 형상을 띤 인간을 발견한다.


그러니까, 이 작품이 지금 문단과 장르를 넘나들며 제일 잘 나가는 한국 소설가가 쓴 소설이 맞지? 복제인간들이 토성과 목성을 활개치고 다니면서 서로를 학살하고, 배틀 로얄을 벌여 살아남은 한 명만 유일하게 이세계의 신이 되는 이야기? 웹소설이라 해도 할 말 없겠다. (실제 웹소설은 이렇지 않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세계관의 분위기는 이국적이다. 등장인물의 이름들은 원소주기율표의 '란탄족' 이름들을 차용했는데, 그게 꼭 화학의 특성에 명확하게 들어맞진 않지만 이국적인 분위기에 일조하고, 토성과 목성의 위성들, 이오, 칼리스토, 타이탄 등지를 돌아다니며 잊혀진 신전의 잠들어 있는 여신을 찾아다니는 스토리도 뭔가 그거 같다.


그거...그...그러니까...그리스 신화.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제우스의 아들들이 신의 위상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그런 얘기란 말인가? 작가가 의도하진 않았을지라도 난 그런 비스무레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난 이제부터 이런 분위기를 풍기는 작품의 장르를 '그레코-로망 펑크'라고 이름붙이도록 하겠다. 나중에 '펑크' 계열 중, 사이버펑크와 스팀펑크와 디젤펑크, 그리고 최신 유행하는 '카세트 펑크(Casette Futurism)'를 지나, 미래 SF 작품에 증강-신체를 장착한 그리스 신들이 서로를 죽고 죽이며 신전에 잠든 AI여신을 깨우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장강명이 창시하고 김필산이 이름붙인 '그레코-로망 펑크'라는 장르명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


「님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엽편)

'선녀와 나뭇꾼' 식의 전래동화로 시작되는 아주 짧은 이야기이지만, 결말이 함축적으로 '아 이런 이야기였구나'라는 걸 깨닫게 된다. (그 결말이란, 새삼 무척이나 SF적이다.) 난 이런 구조를 가진 이야기를 무척 좋아하지만, 한 번도 성공적으로 써본 적이 없다. 그게 진짜 어려운 것임을 새삼 느낀다.


「데이터 시대의 사랑」(단편)

주인공 남자와 여자가 사랑에 빠져서 결혼을 했지만, 남자는 바람둥이에 가까운 인성을 지녔고 여자는 그를 충분히 예상하며 남자를 대한다. 뻔한 미래. 남자는 바람을 피우고 그들은 이혼한다. 시간이 흐른 후, 그들은 다시 만나 흘러간 시간을 회상한다.


이게 왜 SF임? 하고 의문을 가질 테지만 난 이 작품이야말로 새삼 아주 훌륭한 SF 작품임을 주장하고 싶다. 이 작품의 배경은, 사랑마저도 데이터와 통계로 예상 가능한 시대이다. 모든 이들이 자신과 통계적으로 잘 맞고 데이터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짝을 찾는다. 하지만 주인공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데이터로 맺어지지 않았고, 그들의 미래는 예측불가능했다. 그들은 결국 파국을 맞았다. 그러나, 그들은 알게 된다. 그 예측 불가능성이란 게 바로 사랑의 일부분, 아니, 본질이라는 걸.


책의 마지막 작품이다. 나는 책의 마지막엔 마치 앨범의 B-side처럼 책을 마무리하는 잔잔한 작품이 실릴 것을 예상하고 큰 기대 없이 읽었지만, 결말에 이르러 난 이 책 자체에 아주 좋은 평을 내릴 운명에 처할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이 얼마만인가. 최고의 단편의 최고의 결말을 마주하며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겨본 경험이.




내가 여기서 하고 싶은 건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의 SF성이다. 앞서서도 말했지만, 이 작가는 SF를 주로 쓰는 작가가 아니다. 그의 초기 소설 『표백』은 대한민국을 사는 청년들의 방황과 고민에 대한 현실적인 이야기다. 그런데 그런 작품을 쓰는 작가가 여기에서는 '공상'과학의 상상력을 극대화해 작품 전체적으로 개성이 강해 겹치지 않는 주제의식과, SF적 소재와 세계관,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장강명이라는 작가가 현재 한국 문학 평단의 높은 평가를 가지고 있는데, 이렇게 수준높은 SF를 쓸 수 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장강명은 사실 SF를 더 잘 쓰는 작가이다? 그는 SF를 더 많이 써야 한다? 아니다. 재능충은 뭘 해도 잘 한다는 것이다.


지겹겠지만, 또다시 SF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할 때다. 무릇 SF란 무엇인가? 사랑 얘기에 우주선, 로봇, 인공지능을 첨가해 보자. 그래도 SF인가? 물론. 난 장르란 작가의 마음 속에 있다고 믿는다. 작가가 SF를 쓰고 싶어서 이런 90%의 작품을 썼다면, 그는 쓰레기를 양산했지만 어쨌든 SF를 쓴 것이다. 그 작품이 쓰레기라 해서 그게 SF가 아닌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장강명 작가 스스로 SF 작가로 포지셔닝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 같으므로, 장강명 작가는 SF작가가 아니고 그가 쓴 이 책은 소설가가 '많은 소설을 써야 하는 와중에 한 번쯤은 써보고 싶어서 쓴 SF'다. 그러나 이 책은 SF의 소재와 주제의식으로 충만하며, 사랑 얘기에 로봇이나 우주선을 첨가한 SF와 깊이가 다른 'SF성'을 내재하고 있다.


'니가 말하고 싶은 SF성이란 게 도대체 뭔데?' 그건 또다시, 인간성의 탐구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SF란 인간으로부터 독립해 초인간 포스트휴먼이 되고, 인간이 아닌 로봇조차도 사랑할 수 있고, 우주선에 업로드된 인간 정신이 우주 공간으로 퍼져 아득히 인간성을 뛰어넘어 버리는 주제 아니던가? 아니다. 그런 게 아니다. 우리가 인간이면 우리를 독자로 한 소설은 결국 인간성을 탐구해야 한다. SF 또한, 다른 문학 장르와 마찬가지로, 인간이란 게 무엇인지를 끈질기게 묻는다. 하지만 SF는 대조하는 방법을 쓴다. 사랑을 지켜 주는 약을 먹은 인간과 그 약을 끊은 인간의 대조 (「정시에 복용하십시오」), 여러 명의 복제인간들이 각자 다른 인생을 살면서 달라지는 인간성을 탐구하는 대조 (「아스타틴」), 데이터 홍수의 시대에 사랑마저 확률과 통계로 따지는 세상에서 그렇지 않았던 시절부터 지켜 오던 인간성과 사랑의 본질에 대한 대조 (「데이터 시대의 사랑」) 말이다. 봇 얘기를 쓰고 싶다면 로봇으로부터 인간을 물어야 하고, 인공지능 얘기를 쓰고 싶다면 그로부터 인간이 무슨 존재인지를 탐구해야 한다. 그게 SF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